[에브리뉴스=최신형 기자] “정치나 선거 프레임 중에서 가장 무섭고 파괴력 있는 프레임이 뭔지 아느냐.” “색깔론? 북풍(北風)? 아니다. 바로 ‘세금폭탄’ 프레임이다.”
지난주 국회에서 기자와 만난 야권 한 관계자가 자문자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참여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로 ‘세금폭탄’ 프레임에 걸려든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
맞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세금’은 피부에 가장 와 닿는 정치 프레임이다. 조세(租稅,) 뒤에 늘 따라다니는 단어는 ‘저항’이고, 흔히 정부당국의 세금 낭비를 ‘혈세(血稅)’로 표현하지 않나.
이뿐만이 아니다. 모든 한자성어 책 앞장엔 ‘가렴주구(苛斂誅求-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등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빼앗는 것)’가 있다. 그만큼 세금 문제는 민감하다.
조세의 형평성이나 세원 투명성, 재정지출 건전성 확보 등의 원론적인 전제조건을 달지 않아도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부당국이 돈을 ‘강제징수’하는데 기분 좋을 리 없다. 합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국가’가 합법적인 강탈인 ‘세 징수’를 한다면, 그 어느 누가 달가워할까.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와 민주당의 장외투쟁, 시민사회 시국회의 측의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로 어수선했던 지난 8일 박근혜 정부의 첫 세법개정안이 발표되자 ‘세금폭탄 프레임’이 여의도 정가를 휩쓸었다.
이명박 정부 내내 공급경제학의 핵심인 ‘감세’ 정책을 시도했던 새누리당 입에선 ‘증세’가 나왔고, 보편적 복지가 시대적 화두라고 외치던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의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으로 규정했다.
청와대도 ‘깜짝’ 놀랐다. 야권이 세금폭탄 프레임을 전면에 내세우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세저항을 우려해서다. 결국 박 대통령은 1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새 정부의 첫 세제개편안과 관련해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다. 현오석 경제팀이 세제개편안을 발표한 지 4일 만이다.
박 대통령은 “서민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데 서민과 중산층의 가벼운 지갑을 다시 얇게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난다”고 선을 그은 뒤 “이번 (세제) 개편안은 국회 논의 과정이 남아있다. 앞으로 당과 국회와도 적극 협의하고 의견을 수렴해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바란다”고 이같이 말했다.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 과연 세금폭탄일까
핵심 쟁점은 ‘직장인의 13번째 월급’인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이다. 흔히 월급쟁이로 불리는 직장인들이 세 부담이 증가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민주당에선 이를 ‘세금폭탄’으로 규정해버렸다.
실제 기획재정부가 근로자 1천550만 명의 2011년 근로소득을 근거로 산출한 결과를 보면, 총 급여 3천450만원∼7천만원 사이에 있는 근로자는 연간 16만원 정도 세 부담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봉급생활자를 중심으로 ‘반(反) 박근혜’ 전선의 흐름이 확인되자 이날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증세가 맞다”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세금폭탄이 맞다”고 대립각을 세웠다. 이쯤 되면 격세지감이다. 그 누가 새누리당 대표 입에서 ‘증세’가, 민주당 대표 입에서 ‘세금폭탄’ 프레임이 나올지 알았겠는가.
그런데 의문이다.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이 과연 세금폭탄일까. 소득공제는 봉급생활자가 납부한 소득세 중 일정 비율을 환급해 주는 제도다. 세액공제는 과표기준에 따라 과세한 뒤 공제 항목에 따라 지출한 경비를 돌려주는 제도다. 쉽게 말해 고소득층에겐 소득공제가 유리하다. 세액공제는 ‘일정 소득’ 이상이면 공제혜택이 같다.
정부당국이 연간 총 급여 3천450만원 이상인 근로자가 28% 정도 된다고 발표하자 ‘중산층의 범위’ 논쟁에서부터 박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 공약 후퇴 논란, ‘중산층 쥐어짜기’ 비판이 막 튀어나왔다. 그것이 합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국가’가 합법적인 강탈인 ‘세 징수’를 하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그냥 반(反) 박근혜 프레임에 의한 ‘진영논리’일 수도 있다.
문제는 ‘세금폭탄’ 프레임으로 2013년 체제의 큰 줄기인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 어젠다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의 세법개정안으로 상위 28%인 총급여 3천450만원 봉급생활자들은 연간 16만원의 세금을 내는 반면 72%의 봉급생활자들은 혜택을 본다. 구체적으로 총급여 1천∼2천만원의 봉급자의 경우 13만원, 2천∼3천만원 사이에 있는 봉급자는 연간 18만원 정도 각각 이익이다.
총 급여 1천∼2천만원 구간에는 비정규직, 여성, 노인 등 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고, 2천∼3천만원 구간 역시 사회 초년생이나 주로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이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전체 노동자 중 상위 28%는 세금을 더 내고, 하위 72%는 혜택을 보는 것. 이것은 보편적 복지의 필요조건인 ‘증세’를 위한 첫걸음이다. 야권 지지층도 지난 대선 때 보편적 복지와 증세를 요구하지 않았나. 박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를 두고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비난하지 않았나.
‘증세 없는 복지’를 하면 현실 가능성을 타박하고, ‘증세’를 하면 조세저항을 일으킨다? 이건 논리적 모순이다. 지난 2005년 과세 대상이 불과 상위 2% 부동산 소유자에 국한된 종합부동산세가 ‘세금폭탄’으로 둔갑,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의 뭇매를 맞은 사건을 벌써 있었나.
박근혜 정부의 첫 세제개편안이 옳은 방향이라는 게 아니다. 물론 잘못됐다. 노동자에겐 엄격한 ‘국민개세주의’ 잣대를 적용했고 대기업 재벌에는 법인세 누진세율 2단계 간소화를 통해 혜택을 안겨줬다. 여전히 낙수효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을 보임으로써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임을 자인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부자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 대신 ‘세금폭탄’ 프레임을 들고 전선확장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 내내 써먹은 ‘부자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 프레임의 효과를 감지해서였을까. 이런 민주당의 행보가 향후 선거에서 덫으로 작용할까 우려스럽다.
한국식 사민주의로 가기 위한 첫 초석은 ‘전 국민의 증세’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에 28%에 달하는 상위계층에서 선(先) 부담하고 점차 그 범위를 확대하자는 거다. 증세에 대한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은 증세 찬성 기조 아래 부자감세, 법인세 논쟁에 나서기를 왜 주저했을까. 과연 민주당은 전 국민의 조세저항을 뚫고 2013년 체제를 여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민주당은 이날 박 대통령의 세제개편안 재검토 지시 이후 ‘정국 주도권’을 잡았다는 자평을 내리고 부자감세 철회로 프레임을 옮길 모양이다. 세금폭탄 프레임에서 ‘재미’를 본 민주당이 다음 선거에서 어떤 조세정책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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