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은 노벨문학상 배출 ‘한국은 찬밥’
일본은 해외번역본 2만권 한국은 불과 2천권
전업작가 1% 글로벌 경쟁력 사막서 샘물찾기
다문화시대 본격도래 지구촌에 알릴 절호기회
◆ 노벨문학상? 님은 먼 곳에 있는가!
2012년 노벨 문학상의 주인공은 중국의 ‘모옌’이다. 중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모옌’은 1981년 '말이 없다'는 뜻을 가진 필명 '모옌'으로 등단했다. 그는 1986년 발표한 중편 소설 '붉은 수수밭'이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소설가다. 특히 그가 '탄샹싱'이란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고통에 대한 묘사력과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는 문학적 소양은 대단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노벨문학상은 “한ㆍ중ㆍ일 3파전으로 전개됐다”고 한다. 한국의 시인 고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중국의 소설가 모옌이었다. 그러나 한림원은 중국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나라가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라는 소식이 전해지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가장 먼저 번역의 문제가 거론된다. 그것은 노벨문학상을 비롯해서 외국 유명 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 문학 자체를 세계적으로 알려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실패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 한글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했을 때 문학적 감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즉, 섬세한 우리 문학의 말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자칫 무미건조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시의 경우는 산문 문학 보다 비약과 함축이 심해 외국어로 번역될 때 ‘정서적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번역이 원작보다 뛰어난 경우는 없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단순 번역이 아닌 재창작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푸르다’는 영어로 말한다면 ‘Blue’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 ‘푸르스름하다’ ‘푸르댕댕하다 ’ ‘짙푸르다’를 제 아무리 영어로 번역을 잘해도 작가의 감성을 외국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리기가 어려우니 불리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문학 언어란 어휘의 차원을 넘어 문장과 작품 구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어감은 문장 혹은 구조 차원에서 동일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작품의 번역은 어휘 대 어휘의 번역차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웃 나라인 일본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2명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것도 번역 덕을 많이 보았다는 분석이다. 일본은 1950년대를 지나면서 국가가 직접 나서서 번역 작업을 지원했고 지금까지 약 2만종에 이르는 문학작품이 외국에 소개됐다.
일본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 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동경대 영문과 교수가 노벨문학상을 타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전문번역가 양성이 중요한 과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1년에서야 한국문학번역원을 설립하여 번역, 출판 지원과 번역가 양성에 나서고 있다. ‘외국에 소개된 한국 문학은 아직 2,000여 종에 불과하다’고 한다. 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외국에 번역돼 소개되는 우리 문학 작품의 양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번역가의 번역을 돈벌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번역가들의 고료나 사회적 대우는 형편없는 실정이다. 그러니 번역가들이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겠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번역가를 찾는 다는 것은 한강에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국 문학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역량과 콘텐츠가 쌓이고 그것을 외국에 퍼뜨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출판사들이 수준 높은 한국문학을 출판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번역가를 만날 수 없어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나라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방송작품을 지원하는 기금이 있듯이, 한국어 번역을 위한 기금을 충분히 조성하고 널리 활용해서 많은 작품들은 재외 공관에 비치하고 그 지역 도서관에 무료로 기부를 해야 한다.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번역가들이 양성되고, 책들이 외국에 보급되어 그것을 통해 한국 문학에 관심 갖는 외국인들이 많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갈구하면서도 문인에 대한 예우는 어떤가? 1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한국문인협회도 사무실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좌절감은 물론이고 배신감마저 든다. 문화는 민족의 예술적·정신적 표현의 총체로서 선진국의 척도로 해석되고 있다. 교양과 품위를 갖춘 인격체로서 문화 국민이 되어야만 비로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돈은 필요할 때 써야한다"는 것은 경제 원리의 기본이다.
정부는 말로만 문화예술의 창달과 예술인의 사기 진작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문화예산이 홀대 받는 것은 문화의 중요성과 문화콘텐츠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라도 지금이 바로 문학부분에 적극적인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노벨문학상 수상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문협의 회원은 올해로 ‘1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등록 문인들 숫자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문협의 회원 중 원고료를 받아 생활을 꾸려나가는 전업 작가는 1%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대부분의 문인들은 다른 직업에 종사면서 글을 쓰는 투 잡스(Two Jobs)들이다. 투잡스들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글 쓰는 것은 부업이기 때문에 전업 작가가 아님은 자명하다.
배고픈 문인들이 부지기수이만 정부에서는 대책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선주자들도 문화예술정책에 대하여 일언반구가 없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문인단체들이 있다. 자기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자기들만의 권익에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배고픈 문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나 대안을 건의하고 교섭하는 곳은 없다. 회원들의 회비를 걷어 운영할 뿐이다. 뚜렷한 명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는 한국문협에서 문인들에게 원고료를 지불한다고 큰소리치더니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정부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화예산이 GNP의 1%를 넘어섰다고 말한 지 오래다. 그러나 전체 문인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혜택이 없다. 그나마 쥐꼬리만 한 지원금도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나눠먹는다는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이제 한국문협에 맡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인들 모두가 역량을 모아 원고료 지급 정책을 해결해야 한다. 배고픈 문학인을 살리고 안정 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인 의견표출과 설득이 필요하다. 지금 문인들은 배가 고프다.
체육은 박지성, 김연아 등이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장동건을 비롯한 한류스타들이 부지기수다. 영화는 해외에서 황금사자상까지 덜컥 받아왔다. 그런가하면 음악은 싸이가 빌보드 1위를 넘겨다보고 있다.
그러나 문학만은 아직은 아니다. ‘문학, 너는 왜 다른 형제들처럼 한 건 못하느냐?’고 군밤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중국마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니 옆집 아이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도 넘는 교육열과 국민 정서가 더해져 문학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극약처방이라면서 ‘번역을 잘 해야 한다. 세계적 홍보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니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노벨 문학상의 근본적 수여 방식은 번역이나 마케팅이 아닌 '좋은 작품'이다. 수준 높은 문학의 양이 확보될 때 비로소 노벨문학상이 담보되는 것이다.
1세기 동안 2만권의 자기 나라의 소설을 번역한 일본의 경우 훌륭한 번역가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2만권의 '좋은 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봐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본은 첫째도 둘째도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좋은 작품 뒤에 수준 높은 번역이 있다. 좋은 작품, 훌륭한 작품을 보면 세계적인 출판사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번역에 집중했다는 사실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어휴! 정말 답답하다.
◆ 지금 출판업계는 빈사상태?
요즘 출판계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책이 안 팔린다는 것이다. 왜 책이 안 팔린단 말인가? 그것은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지만 베스트셀러니 밀리언셀러는 있어도 정말 책다운 책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현장에서 조차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면서 극단적으로 줄 세우기에 치중하는 교육시스템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학원들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초등학생 잡기에 여념이 없다. 곧 유아 중심으로 교육시스템을 재편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런 추세로 말미암아 아동출판시장은 올해 작년에 비해 약 30% 정도 매출이 감소했다. 이런 하강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이런 행태가 계속 된다면, 결국 출판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출판시장에는 전자책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출판평론가는 전자책은 올드미디어인 종이책의 자양분을 먹고 성장하고 종이책은 생존을 위해 자신만의 장점을 특화시키는 데 매달리게 되어 두 미디어가 상호 보완하며 ‘진정한 책의 시대’를 이끌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히지 않는 것이 교육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논술 준비를 하면서 모범 답안을 빠르게 작성하는 방법만 가르친다. 우리나라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프랑스 대학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의 기출 문제와 답안을 열심히 읽고 외우도록 한다. 이런 일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교사들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지 몰라도 많은 학생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범 답안만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한 권의 동화나 소설 등을 완독시키고 자기 삶과 비교하여 한 편의 글에 담아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책 읽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길러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곳곳에 도서관이나 도서실을 만들고 충분한 양의 책을 비치해야 한다.
아이들이 쉽게 접근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고, 신선한 책이 많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장 도서가 1만 권은 되어야 누가 들어와도 입맛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는 수준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책과 가까이 하는 어린이들이 자라서 훌륭한 작가가 되고 수준 높은 글을 쓸 때 노벨문학상 수상도 가능한 것이다.
◆ 다문화 가정 및 외국에 한글 알리기
우리나라 다문화 인구가 150만에 이를 전망이라고 한다. 다문화가정의 학생이 6만 명 시대다. 다문화가정 정책들은 단순히 결혼이민자들을 ‘한국인’으로만 동화시키려 하고, 이주민들의 사회적·문화적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창구를 열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다문화가정들, 특히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자신감 결여 등의 정신적 피해를 입히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이제 다문화 가정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 문화에 동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한글을 익혀 언어와 문자의 장벽을 넘어서야겠다. 그것은 문학이 담당해야 할 한 몫이기도 하다.
세계 최초로 한글을 공식 표기 문자로 도입했던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 찌아찌아족의 바우바우시에서 한국어 교육기관 세종학당과 한국인 교사가 철수했다고 한다. 이유는 세종학당 운영 과정에서 경북대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바우바우시 측과 각종 오해를 빚다가 7개월 만에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태가 알려지면서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혀왔던 찌아찌아족 대상 한글 보급 활동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찌아찌아족은 우리나라가 한글을 표기문자로 수출한 최초의 유일 무일한 민족이다.
한글이 찌아찌아족과 함께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야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달려있다. 뜻있는 사람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글수출 1호' 찌아찌아족 한국어 교육이 중단될 처지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발로한다. 관계는 바로 소통의 길이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심리적 압박감과 경제 불황에서 상대적 빈곤감에 눌려 산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적인 초월의 세계가 필요하다.
이런 심리적 압박감과 상대적 빈곤감은 문학과의 만남을 통해서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무너진 관계를 다시 일으켜 줄 뿐만 아니라 이해의 다리를 놓아주어 서로에게 버팀목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결국 문학의 힘은 소통의 길을 트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인 동시에 안아주는 넓은 가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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