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뉴스=최신형 기자] 미증유의 위기다. 국정원(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태와 NLL(서해 북방한계선) 논란으로 여야 대치가 한창인 7월 중순, 국가기밀문서가 증발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 유실 사건 얘기다.
여야 의원 10명으로 구성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관련자료 열람위원단은 전날(17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방문했지만,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 자료를 찾는 데 실패했다.
아직까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실 논란이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원본의 부존재로 결론이 날지는 미지수다.
남북정상회담 유실 논란이 문서시스템 오류로 판명난다면 ‘찻잔 속 태풍’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고의 파기에 힘이 실릴 경우엔 ‘어느 정부가, 왜, 언제’ 등을 둘러싸고 여야 대립이 극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의혹이 실체로 확인되는 순간,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 둘 중 한 정권은 치명타가 불가피한 셈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남북정상회담’이란 중대외교 문서의 ‘원본’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든 만큼 여야 책임론을 떠나 국제적 망신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노무현 NLL 발언 논란 시작은 지난해 10월 8일
지난 2월 21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고 주장해 민주당으로부터 고발당한 새누리당 ‘정문헌-이철우’ 의원 등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앞서 정 의원은 지난해 10월 8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언급하며 “노 전 대통령이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며 구두약속을 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그러면서 그는 참여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폐기’하라고 지시, 현재 대화록이 통일부와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당과 노무현재단 등은 정 의원을 향해 “구태정치”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참여정부 인사인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등은 같은 달 10일 “노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엔 별도의 단독회담도 비밀합의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정 의원은 다음날인 지난해 10월 11일 “별도의 정상회담이 아니라 배석자들이 있는 가운데 단독회담을 한 것”이라며 “이재정 전 장관이 인정한 대화록이 내가 말한 그 대화록”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틀 뒤인 12일엔 문재인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책임지겠다”고 응수했고, 민주당은 정 의원과 당시 이철우 원내대변인, 박선규 선대위 공보위원을 허위사실유포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NLL 대화록을 공공기록물로 판단한 검찰은 지난 1월 16일 ‘정문헌-이철우-박선규’ 등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검찰 수사에 불복한 민주당은 지난 3월 14일 서울고검에 항고했으나, 검찰은 지난 5월 21일 민주당의 항고를 기각했다. NLL 논란은 그렇게 수면 아래로 잠복하는 듯했다.
한 달여 뒤인 지난 6월 1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논란에 불을 댕겼다. 그는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 업무보고에서 “NLL 포기 논란은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짠 시나리오라고 주장”, NLL 논란이 재점화됐다.
다음날인 18일 정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자청, 박 의원의 주장을 “명백한 허위사실 유포”라고 반박한 뒤 이틀 뒤(6월 20일) 국회 정보위원장인 서상기 의원 등 새누리당 정보위 소속 의원들과 국정원에 보관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열람했다.
숱한 의혹 속에 국기기록원 방문해보니 “대화록이 없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로 일촉즉발 상황으로 치닫던 국회는 이내 NLL 블랙홀에 휩싸였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 의원은 지난달 21일 “대화록 원본 등 관련 자료를 전면 공개하라”고 맞섰다.
3일 뒤(6월 24일) 국정원이 국회를 직접 방문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공개,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NLL 논란을 고리로 박근혜 정부와 남재준 국정원장 간 커넥션 의혹이 급물살 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권영세 주중대사(대선 당시 종합상황실장)가 지난해 12월 10일 여의도 한 오찬에서 “(NLL)자료 구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거는 우리가 집권하면 (까고)”라고 한 발언과 4일 뒤(12월 14일)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의 부산유세 발언 등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국정원을 고리로 MB정권과 박근혜 캠프가 깊숙히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런 가운데 참여정부 당시 국정원 수장이었던 김만복 전 원장은 지난 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은 2008년 1월 작성한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김 전 원장에 따르면, 2007년 10월에 작성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1부만 남기고 모두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국정원이 2008년 1월에 새로 대화록을 작성한 것은 ‘항명죄’와 ‘비밀누설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앞서 2007년 10월 3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노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자료를 청와대와 국정원에 각각 1부씩 보관하도록 김 전 원장에게 지시했고, 이에 김 전 원장은 대통령 지시에 따라 이 2부를 제외한 나머지 문서를 모두 폐기하라고 국정원 고위간부에게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부터 정치권에선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원본과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전날(17일) 남북정상회담 관련자료 열람위원단의 국가기록관 방문에 이목이 쏠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이 없다는 논란에 휩싸인 것.
가능성은 두 가지다. ▲원본이 있지만 찾지 못했을 경우 ▲원본 자체가 유실됐을 가능성 등이다. 후자는 특정 정부에서 고의 파기했거나 이관 과정에서의 누락 등 두 가지로 나뉜다.
민주당과 노 전 대통령 측에선 참여정부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과 현재 국가기록원 문서시스템이 다른 점을 감안,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경우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실 논란이 기술적 문제에 그치는 만큼 파장도 적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 자체가 없다면,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어느 정부가, 언제, 어디서, 왜’로 좁아진다. 여야 정치권은 벌써부터 폐기 공방전에 나섰다.
새누리당은 이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강경파 내부에선 노무현 정부 폐기론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고,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이명박 책임론을 끄집어내며 맞불을 놓았다.
이 경우 둘 중 한 정권은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나는 치명타를 안게 될 것으로 보여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양측 간 치킨게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게다가 이날 여야 열람위원들은 녹음파일도 찾지 못했다고 밝혀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위원인 황진하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이같이 말한 뒤 “국가기록원을 방문해 추가 검색결과를 확인했지만, 해당 자료는 찾지 못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한편 그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열람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힌 안철수 무소속 의원은 같은 날 전주 덕진예술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실 논란과 관련해 “믿고 싶지 않다”면서도 “만약 찾지 못한다면 분명한 원인 규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사안을 엄중히 분리해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안 의원은 “국정원 대선 개입이라는 엄중한 사안에 대해 진실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하고 다음 대선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며 본질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의 진상규명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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