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선거사-31)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로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3대 때와 같지만, 지역구가 224명에서 237명으로 늘어나고 대신 전국구가 75명에서 62명으로 줄어들었다.
선거 방식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의 지역구와 비례대표제의 전국구로 구분해 실시되었다. 전국구의 의석 배분은 정당의 의석 비율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5석 이상의 의석을 얻은 정당을 자격 요건으로 하되 5석 미만을 차지한 정당도 총 유효투표 수의 3% 이상을 얻으면 우선적으로 1석을 배분하기로 하였다.
선거의 양상은 민주자유당, 평화민주당과 1990년 6월 15일 삼당합당을 반대하는 이기택 · 노무현 · 김정길 등의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과 박찬종 · 이철 등의 무소속 의원 등을 중심으로 창당한 꼬마 민주당으로 불린 민주당과 합당한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의 통합으로 탄생한 민주당 그리고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함에 따라 1992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해 2월 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탄생한 통일국민당의 3파전으로 압축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이 149석(지역구 116, 전국구 33), 민주당이 97석(지역구 75, 전국구 22), 통일국민당이 31석(지역구 24, 전국구 7)을 차지하였다. 그 밖에 무소속이 21석, 신정치개혁당이 1석을 차지하였다.
이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1석 차이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여 다시금 여소야대의 운명에 놓인다.
14대 국회의원 선거 역시 지역감정이 그대로 표출된 선거로 영남을 텃밭으로 하는 민자당이 광주와 전남에서 한 석도 못 건지고 전북에서는 황인성 전 총리와 양창식 의원 등 두석 만 건진다.
또한 민주당 역시 민자당의 텃밭인 부산, 대구, 경북, 경남에서 한 석도 확보 못함으로써 지역선거 행태가 완벽하게 토착화되었다.
공선협의 태동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특이한 사항은 공선협(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의 등장과 그를 통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991년 2월 7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가 창립회의를 개최하고 이후 정부의 정책에 관해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성명서를 내는 등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또한 공직후보자의 선택 기준을 정하여 타락 후보 안 찍기 캠페인을 개최하고 급기야 공명선거실천 시민감시단 발대식을 거행한다.
적극적인 정치참여보다는 국민계몽에 주력하던 공선협은 총선 이틀 전인 3월 22일 군 부재자 투표 부정행위에 관한 이지문 중위의 증언 기자회견을 주도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육군 9사단 현역 장교인 이지문 중위가 종로 5가에 소재한 공명선거실천시민협의회 전국본부 사무실을 찾아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부대 내에서 실시한 부재자 투표에서 지휘관의 정신교육, 공공연한 공개투표, 기무부대의 사전검열 등에 대해 기자회견, 군 내부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중위의 폭로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군의 부재자 투표를 앞두고 집권 여당에 투표하도록 집중적인 정신교육이 이어졌다.
둘째, 비밀투표가 아닌 부대에 따라 인사계 혹은 중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개 기표하도록 했다.
셋째, 투표가 끝난 후 기무사 파견대에서 서신 검열기로 투표 내용을 사전 점검토록 했다.
넷째, 일부 사병들이 이와 관련 양심선언 등의 행태로 세상에 알릴 것을 염려하여 투표 후 2 주내에 사병들의 외출 외박을 금지토록 했다.』
이로 인해 이지문 중위는 당일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고 이튿날 국방부는 발 빠르게 대변인 성명을 발표하며 대처에 나선다.
‘이지문 중위가 부정행위를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주변 이야기를 중심으로 폭로 내용을 작성한 듯 보인다. 허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지만 군 수사당국은 철저하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서 그 결과를 공개하겠다.’
이에 대해 공선협은 물론 민변 등 사회단체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파장이 일파만파 번지기 시작했다. 이어 국방부는 선거 당일인 24일 이지문 파문에 대한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국방부는 ‘군은 서신 검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올바른 주권 행사를 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정신교육을 시켰으며 또한 선거 분위기에 휩쓸릴까 보아 외출 외박을 금지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위의 양심선언으로 그해 12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부터 군인들이 부대 밖으로 나가 민간인들과 함께 부재자 투표를 하게 됐고, 군부대 내 부정선거 시비는 잦아들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거창하게 부정에 대해 양심선언을 한 이지문 중위가 이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서울시 의원에 출마한다는 사실이다.
공선협은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임하고 총선시마다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재벌의 정치 참여
1992년 1월 3일 현대그룹의 총수인 정주영이 돌연 정치참여를 선언하고 나섰다. 기성 정치인들이 정치를 제대로 못해 나라가 어지러워졌다며, 이들에게 다시 나라를 맡길 수 없어 현실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그 사유를 밝힌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정주영 총수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그를 모델로 한 경제 발전, 또 물에 비견되고는 했던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과 김영삼 · 김대중 식의 비현실적인 민주화에 대한 환멸이 한몫했다.
특히 전두환의 5공화국 출범 당시 기업 통폐합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을 보았고 노태우의 6공화국 초기에 청문회에 불려나가 수모를 당한데다가 급기야 지난해인 1991년 1,361억 원에 이르는 세금을 추징당한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또한 정주영은 매해 청와대에 추석과 연말마다 정치자금을 제공했음을 밝히면서 은연중에 그 돈이면 정치단체를 형성하여 새롭게 정치판 구도를 짤 수 있다는 포부를 밝히고는 했다.
이어 정주영은 정치참여를 밝힌 지 불과 10일도 되지 않은 1월 11일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발기인 대회를 개최한다. 그 대회에는 양순직, 박한상 등의 중진 정치인을 비롯하여 아들인 정몽준, 김광일, 김길곤 등이 참여한다.
또한 발기인 명단에 다수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한다. 당시 대한민국 간판 탤런트였던 최불암과 강부자, 방송작가인 김수현과 한운사, 국악인 안비취, 작곡가 박춘석, 거기에 더하여 당대를 풍미하던 코미디언 이주일까지 합세하여 정치단체가 아닌 그야말로 문화예술 단체의 이미지를 풍기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까지 이르자 세간의 시선은 현대건설 출신의 현 이명박 대통령에게 주목된다. 정주영과는 바늘과 실 사이로 비견되었던 이명박이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을 뒤로하고 민자당에 입당했는데 당시까지 거취를 명확히 표명하지 못한 채 지역구 후보자로도 공천 신청을 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민자당 전국구와 정주영의 신당 합류 사이에서 고민한 듯 보이다가 결국 이명박은 민자당의 전국구를 선택한다. 이명박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역정에 대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즉 이명박으로서는 같은 경제 이미지를 풍기는 정주영의 그늘 아래서는 더 이상의 비전이 보이지 않았고 기성 정치판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결정한다. 또한 전국구를 택한 사유로, 본인은 서울 시장 출마를 희망했으나 지자체 선거가 연기되어 할 수 없이 전국구를 선택하였다고 강변하나 지역구 출마 시 정주영이 반드시 손을 봐야할 인사로 지목되고 저돌적인 그의 금력에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택한 고육지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하튼 정주영은 이어 김동길이 주도하던 새한당과 합당을 통해 총선에 참여한다. 그리고 김종필이 민자당에 참여하여 생긴 공백을 대신하여 소기의 성과를 일구어낸다.
S. doctor 김 | webmaster@ever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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