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국회의원선거
1963년 11월 26일 실시된다. 이 선거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 즉,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로 나누어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병용했다. 지역구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거구별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였고 전국구는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간접 선출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정당추천제로 바꾸어 무소속 입후보를 차단하였고, 선거운동 역시 정당 본위로 하여 개인의 선거운동을 제한하였다. 투표는 1인 1표로 전국구와 지역구 후보자를 동시에 선택하도록 하였고 전국구는 의석배분에 특례를 두었다.
후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당에 소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12개에 달하는 정당이 난립하는 현상이 빚어졌고, 이에 따라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거 결과 의원 정수 175명(지역구 131명, 전국국 44명) 가운데 민주공화당이 110명(지역구 88, 전국구 22)이 당선되어 의원 정수의 62.8%를 차지하였다. 이어 민정당이 41명(지역구 27, 전국구 14), 민주당이 13명(지역구 8, 전국구 5), 자유민주당이 9명(지역구 6, 전국구 3), 국민의 당이 2명(지역구)을 차지하였고,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정당이 7개나 되었다.
야당의 패인
6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의 공화당이 과반을 넘어서느냐가 관건이었다. 지난 10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 결과를 살피면 어느 당도 과반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추론이 가능했고 당시 모든 언론 역시 그런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개표가 진행되자 일반의 예상을 깨고 민주공화당이 과반 의석이 넘는 압승의 결과가 나타났다. 즉 정치 안정과 경제의 자립을 주장하는 공화당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야당의 어설픈 야합, 윤보선 후보 측의 10.15부정 개표설에 따른 박정희 당선자의 유세 지원 그리고 지난 대선 시 대통령에 후보를 내지 않은 야당들의 참패로 판단할 수 있다.
총선에 앞서 11월 7일 민정당, 민주당, 국민의 당, 자민당 등 야 4당의 대표들은 공동전략 수립기구로서‘대여공동투쟁협의회’구성에 합의한다. 또한 공동선거 구호 및 선거공동감시단 구성 및 야당끼리의 비난을 자제하자는데 합의를 본다.
이런 경우라면 반드시 야당의 연합공천이 이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여당의 관권· 부정 선거에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전략으로 임하나 막상 선거전이 개시되자 여야 간의 실력대결은 차치하고 야당 후보가 난립한 상태에서 표가 분산되고 결국 여당후보 당선에 일조하고 만다.
공화당이 투표율에서 32.4%의 지지를 얻었으나 의석수에서 63%를 상회하는 의석을 확보한 사실은 이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이와 아울러 선거가 한참 진행 중인 11월 14일 민정당의 윤보선이 진해 지원유세에서 10월 15일 개최된 지난 대통령 선거 시에 부정 개표가 있었다며 박정희 당선자와 중앙선관위 위원장인 사광옥을 상대로 선거무효 및 당선 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나섰다.
박정희 당선자의 선거운동 참여를 두고 불법 운운하던 윤보선이 박정희 당선자가 자연스럽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결국 박정희 공화당 총재는 강경한 어조로 발언에 책임을 지고 그 진실을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힐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그를 밝히지 못할 시 사직당국에 고발하여 형사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강력하게 응수한다. 이어 윤보선이 주장한 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불명예스런 승리를 즉각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라도 윤보선의 발언의 진위 여부를 가리겠다고 일침을 가한다.
윤보선이 갑자기 그런 발언을 한 배경에는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그 시간 진해에 묶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예 선거 종반의 이슈로 만들어달라는 민정당 중앙당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여하튼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는 그를 기회로 다른 현안에 대해서도 지원 유세를 펼친다.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 즉 서민의 최대 이슈는 물가상승 문제였다. 특히 선거 종반전에 접어들자 생필품 가격과 협정 요금이 마구 뛰자 야당은 즉각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 박정희는 선거 기간 중에는 물가 억제에 대한 특효약이 없다고 시인하고 선거가 끝나면 과감한 해결책을 세워 물가안정에 거국적인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공약하고 나서며 자연스럽게 선거에 참여하고 결국 공화당 승리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또한 이 대목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정당 정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고 안 내고의 차이가 바로 드러난다.
지난 대선 시 대통령 후보를 낸 윤보선의 민정당은 41석을 확보한데 반해 후보를 내지 않은 야당의 본류라는 민주당은 13명, 후보가 사퇴한 자유민주당은 9명, 또 국민의 당은 2석을 확보하는데 그치고 만다.
김대중의 선전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 16일 김대중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목포에서 한 사건이, 전남도경 목포경찰서 정보반장 나승원 경사가 경찰의 부정선거 공작 내용을 폭로하는 일이 발생한다. 지난 10.15 대통령 선거 및 11.26 총선에 경찰이 선거활동에 직접 관여하여 여당 후보 당선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불법을 저질렀고 또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승원 경사는 목포 지역이 아닌 서울, 또 민주당사가 아닌 민정당사로 찾아가서 폭로하는데 이와 관련 후일 검찰의 조사 진행 과정을 살피면 흥미로운 부분이 눈에 뜨인다.
『나승원 경사가 지령 문건을 가지고 가장 먼저 접촉했던 인사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대중이 사장으로 있었던 목포일보의 김문옥 당시 사장이었고 다음은 민주당 목포시당 위원장인 김경인 그리고 민주당 대변인으로 목포시에 출마한 김대중이었다. …… 검찰은 23일 목포 서에서 부정선거관련 비밀지령 문서를 압수하고 나승원으로부터 받아 김대중이 보관하고 있던 경찰지령 문서도 압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승원 경사는 물론이고 목포경찰서장도 함께 구속되는데,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 여파 때문인지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22,513표를 기록하여 공화당 차문석 후보를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다.
선거가 끝난 1963년 12월 16일 사면령이 발동되어 나승원은 구속된 목포서장과 함께 풀려나 사건은 일단락되지만 그 후 흥미로운 기록들이 눈에 뜨인다.
1964년 1월 30일 국회에서 엄민영 당시 내무부 장관과 김대중 의원이 나승원이 방청석에 참석한 가운데 설전을 벌인다.
부정선거와 관련 답변에 나선 엄민영 내무부 장관이‘말단 경찰의 과잉충성으로 불미스런 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김대중 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았느냐’고 말하자 김대중이 즉각 반발에 나서고 엄 내무에게 발언 취소를 요구한다. 그러나 엄 내무는 끝까지 그 발언을 취소하지 않는다.
또 1964년 4월 4일 김대중의 동아일보 발언 내용을 살펴보자. ‘이제니까 말이지 나승원 경사를 서울로 밀송하고 또 그가 탈취해 내온 부정선거 계획서 원본 등을 서울로 무사히 보내는 데는 참으로 천신만고했었다…… 나는 크게 압승할 수 있었다.’
또한 1965년 1월 9일 동아일보에 김대중과 나승원과 관련하여 흥미를 끄는 기사가 보인다. ‘1964년 연말에 김대중이 수만 원의 장사 밑천을 보태주어 도움을 받았다. 서울 수유리에서 목재장사를 하고 있다.’
김대중과 나승원의 관계는 1971년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에도 이어진다. 1971년 3월 24일 신민당 공약발표 대회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나승원에게 부정선거 폭로 규탄 유공자로 상장과 부상을 수여한다.
이와 관련해서 김대중의 후일 진술을 살펴보자. ‘다행히 부정을 지시받은 목포경찰서 정보반장 나승원 경사가 국회의원 선거대책이라는 부정선거 비밀지령문을 폭로해주었다. 나 경사는 내가 속한 민주당이 아닌 또 다른 야당인 민정당에 가서 13개 항목에 걸친 부정선거에 대한 상부의 비밀지령을 특별 기자회견 석상에서 폭로해버렸다. 물론 그 비밀지령 내용은 나를 낙선시킬 목적이었다. 목포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고, 그런 부정행위를 일체 할 수 없게 되었다. 부정을 저지를 계획이 중단된 덕분에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수 있었다.’
유진산의 운명
정치판에서‘진산파동’, ‘사쿠라’로 널리 알려진 유진산의 행적은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언론법과 관련 당에서 제명 처분되고 또 8대 선거 시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갑 선거구를 새파란 젊은이에게 넘기고 자신은 전국구 1번을 배정받고는 했던 일, 당대의 실세들과의 연합설이 6대 선거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행적만큼이나 그의 지역구 역시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의 지역구인 금산은 당시 전라북도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역구를 떠나 전국구로 선회하는 시점인 1963년 1월에 금산은 충남으로 편입된다.
아울러 유진산은 이전까지 충남 금산이란 지역에서 당선된 적은 없다. 그가 내리 3선을 기록한 장소는 충남이 아닌 전북지역이었다. 5대까지 전북 제8선거구였던 그곳이 6대에 들어 충남 제13선거구로 바뀐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육군 중령으로서 5·16 군사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길재호 혁명정부 법사위원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전해진다. 이북 출신인 그가 지역구로 출마하며 자신의 정치적 고향을 선택하는데 전국에서 길 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금산을 택했고 내친김에 행정구역의 명칭도 변경시켰다고 한다.
여하튼 1963년 9월 27일 최고위원회 법사위원인 길재호가 예편원을 제출하고 금산을 자신의 지역구로 정하자 유진산은 슬그머니 전국구로 돌아서고 만다. 이 과정에서 유진산과 길재호의 묵계설 시비가 일어났다.
그리고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 씨가 영등포갑 구에 출마할 당시도 슬그머니 전국구로 돌아서며 소위 진산파동을 일으키는데 정치에서의 진산의 운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정치인의 변절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정치가 확립되면서 이른바 정치인들에 대한 변절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한다. 새로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이 안전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자당의 후보를 충원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면서 불거진 현상이었다.
동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경북 20개 선거구에서 19석을 석권하고 한 석을 놓치는 일이 발생한다.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광준이 출마한 영양, 울진 지역에서의 일이었다.
김광준은 5대에 동생인 김명윤(1987년 통일민주당 총재권한 대행 역임)과 함께 동반 당선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인물이었다. 본인은 고향인 영양, 울진에서 그리고 동생은 처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바 있었다.
아울러 6대 선거에서도 김광준은 현역의 유리한 입장에서, 또 집권당의 프리미엄을 업고 당선이 유력시 되었었다. 그러나 김광준은 그야말로 정치신인, 스님 출신의 무명이었던 민정당의 진기배 후보에게 석패하고 만다. 현역과 막강한 집권당의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온 데는 이른바 변절 정치인에 대한 대 국민들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였다.
애초에 민정당의 후보로 민정당 전당대회 부의장 등을 역임한 김광준이 공천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하던 민주공화당이 김광준에게 초점을 맞추고 회유에 들어가 결국 민주공화당으로 입당시키고 공천을 주게 된다.
이 문제는 당시 공화당 사무처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나 당 지도부는 그를 무시하고 공천을 확정짓고 선거에 임하게 된다. 이는 철저하게 지역 민심을 무시한 결정으로 지구당 당직자들의 공분을 산다.
이와 관련 김광준의 후임으로 민정당의 공천을 받은 진기배가 본격적으로 선거 운동을 개시해야 할 시점에 지역구를 떠나 서울의 민정당 중앙당을 찾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한 기자가 ‘선거 운동으로 한창 바쁠 터인데 어떻게 중앙에 올라왔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진기배는 주저하지 않고 ‘당선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다. 공화당 당원들이 나를 밀기로, 아니 김광준을 낙선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내 선거 운동은 하나마나이기 때문에 다른 후보자를 도와주어야겠다.’ 고 능청스럽게 답변한다.
이는 이미 중앙의 의도와 이반된 지역의 민심, 즉 정치적 변절자에 대한 공화당 지구당 내의 응징을 확고하게 예견하는 증표였다. 마치 그의 말이 입증이라도 되듯 진기배는 여유롭게 선거운동을 전개하며 경북에서 유일무이하게 민정당 후보로 당선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정치적 변절자로 낙인찍힌 김광준은 자신의 매부인 오준석(7, 8, 9대 당선)에게 지역구를 양보하고 정치판에서 모습을 감춘다. 이 선거의 결과는 한때 변절 정치인의 말로 및 지역민심을 거스른 공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 선례로 회자되고는 했다.
그러나 이후 정당정치가 고착화되면서 정치판에서의 변절은 일상화되고 만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면 마치 홍역을 치르듯이 발생하는 정치인들의 변절이 일상화되고 이제는 스스럼없이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는 한다.
그런 연유로 어처구니없는 신조어가 탄생한다. ‘남의 당으로 가면 변절 정치인이고, 자당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경우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다.’
S. doctor 김 블러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jwkim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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