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뉴스=이호준] 지난 8월1일 고용노동부가 지침을 변경해 실시하고 있는 ‘외국인근로자사업장변경 개선 및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 노동계 및 종교계와 이주노동자권익단체들은 브로커개입방지란 본래의 목적보단 이주노동자들의 이직사업장 선택권을 박탈, 노동의 권리를 유린하는 ‘현대판노예제도’라 규정하며 전면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직을 원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용센터가 제공했던 구인사업장정보제공업무를 멈춤으로 해서 이주노동자들의 유일한 구직문의창구를 없애버린 고용과 노동이란 ‘고용노동부’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아울러 고용주가 구직노동자의 정보를 제공받아 노동자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이를 거부하는 이주노동자의 구직활동 2주간금지 및 무직기간 3개월을 강제추방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현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장 내 노동착취와 산업재해 및 인권유린을 이주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폭력적인 제도란 것이다. 때문에 ‘외국인근로자사업장변경 개선 및 브로커 개입 방지대책’은 마땅히 철회되어야하고, 이주노동자들을 노예화시키는데 악용되고 있는 ‘고용허가제’ 또한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지난 5월 산업재해를 당한 한 이주노동자의 애환을 통해 우리 사회 이주노동자들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공장노동자 생활
필자가 압둘라(MAMAJANOV ABDUKAHOR 37세)를 만나게 된 것은 지난 6월 초, 라시드의 전화 한통 때문이었다. 우즈베크스탄 제2의 도시 나만간(NAMAGAN)에서 온 압둘라와 같은 고향사람인 라시드는 한국에 온지 10년이 넘은 이주노동자로 한국말뿐만 아니라 4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다. 필자와 형 동생하며 지낸지가 4년쯤 되었는데, 일하다 다친 친구를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시간을 맞춰 압둘라를 데리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2003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입국해 3년을 공장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었던 압둘라는 2008년 6월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재입국, 부산시 사하구 학장동에 위치한 샷시 공장에서 일을 했다. 주로 입고된 무게100kg철제 빠레트 50개 중 뒤집혀진 철제빠레트(10~15개)를 동료근로자와 뒤집어 조립한 것을 3층으로 올리고, 3층 호이스트[hoist]를 이용 완성 포장되어 철제빠레트에 적재한 제품(500~1000kg)3~4개를 실은 대차를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고 1층으로 이동해 끌어내는 일을 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이틀정도는 압둘라 혼자 작업했다는 철제빠레트 뒤집어 조립하는 작업과, 500kg~1000kg제품을 적재한 100kg철제 빠레트 3~4개를 실은 대차를 밀고 끄는 작업은 허리에 많은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작업환경이었던 것이다. 지난 5월30일 새벽2시, 사고 또한 뒤집어 조립한 철제빠레트를 3층 작업장으로 올려 보내기 위해 대차에 8~9개를 적재해 엘리베이터 안으로 집어넣어야 되는데, 적재한 철제빠레트의 배열이 맟지 않아 지게차로 들 수 없게 되자 철제빠레트를 들어 배열을 맞추려다 허리를 다쳤던 것이다.
허리 다치고도 작업 강행
문제는 다친 압둘라가 며칠 동안 통원치료를 받았음에도 진전 없는 통증을 호소하자 회사 측 담당직원이 “일을 할 수 없으면 노동부로 가라”며 화를 낸 것이다. 이에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압둘라는 한국 욕을 한국 사람보다 잘하는 라시드를 찾아가 하소연했고 라시드와 함께 필자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5월30일 다친 허리가 두 달 전 그러니까, 3월24일 이미 다쳤던 허리라는 것이다. 지게차를 운전해 입고된 철제 빠레트를 비를 맞으며 적재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지만 고작 4일을 치료했는데, “일해야 된다”는 담당직원의 엄명에 아픔을 참으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상황들을 조합해 볼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2번, 한국 출입국에서 1번의 면밀한 신체검사를 거쳐 3년 동안 현재의 공장에서 100kg~3000kg이상을 밀고, 끌고, 드는 반복 작업을 하다 3월24일 다친 허리를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두 달 후인 5월30일 탈이 난 것을 충분히 따져볼 만 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필자가 산업재해보험에 대한 설명하자 처음듣는 이야기란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압둘라, 다친 허리를 치료하고 남은비자만료기간동안 현재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신의 노동자권리를 필자가 대리로 나서 회사 측에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담당직원과의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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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문화복지 여섯줄사랑회 이호준입니다.”
“예, 어디시라고예?”
“아 예 다름이 아니라 귀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 압둘라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압둘라 근대 왜 그러시는데예?”
“예. 압둘라씨가 귀사의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 다쳤다고 해서,”
“근데 무슨 단체라고예.”
“문화복지 여섯줄 사랑회 회장 이호준입니다.”
“이주노동자단체입니까?”
“아니오. 저희는 실직노숙인조합과 연대하여 거리노숙인을 위해 일하는 단첸데, 외국인들도 노숙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어 상담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근데 압둘라가 거기 왜 간 겁니까?”
“회사에서 일하다 다쳤는데 나가라고 했다 해서, 회사 측 이야기를 들어볼 겸 전화 드렸습니다.”
“제가 담당직원인데 압둘라가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나가라고 한 적은 없고예. 5월30일 날 허리를 다쳤고, 현재까지 요양,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상담을 해보니까. 지난 3월에 이미 일 하다 허리를 다쳤다던데, 당시도 치료를 재대로 못했고 대리님께서 일하기 싫으면 너희나라로 돌아가라 해서 억지로 일했다면서요.”
“아니, 아닙니다. 병원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때도 치료를 했고예. 저는 그런 말 한적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치료하고 있는데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2년 전 작업장에서 폭행당했을 때도, 3달 전 허리를 다쳤을 때도, 치료, 요양하는 동안의 급료를 주지 않았다는데, 치료받는 동안 압둘라 급료지급은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치료를 어떻게 할 건지?”
“아니 폭행이라니요.”
“2년 전 그러니까 압둘라가 귀사의 사업장에서 일한지 1년쯤 되었을 때 100kg철제빠레트 뒤집는 작업을 도와 달라고 요구했다 다짜고짜 휘두른 한국인노동자 주먹에 쓰러져 무차별로 얼굴을 폭행당하고 있는데, 뒤이어 나타난 차장 김모씨까지 합세해 한국인노동자에게 덤볐다며 폭행에 동참했다는데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당시 일주일간 병원을 다녔고, 다음날로 최초폭행을 했던 신입사원 한국인노동자는 내보내고 압둘라에겐 한국인에게 덤빈 죄다. 여기서 일하고 싶으면 조용히 하라며 입단속을 시켰다고 하던데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직 회사에 근무하는 노동자들 중에 증인들도 있고, 병원기록도 있으니까. 나중에 살펴보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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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줄다리기 끝에 치료받는 동안 지급되는 월급70%에 치료가 끝나면 취업비자만료기간까지 일자리를 유지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회사를 방문해 세부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라시드로부터 압둘라가 회사 측과 이야기가 잘 됐다며 다음날 안가도 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산업재해보험 신청
그렇게 일이 잘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난 후 라시드와 압둘라가 필자를 찾아와 회사 측 관계자, 그러니까 담당대리가 모든 약속을 부정하고 압둘라에게 일할 수 없으면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회사관계자와 이야기를 할 사항은 아니 것 같았다. 궁리 끝에 외국인근로에 경험이 풍부한 민주노총산하 ‘서부산노동상담소’와 논의를 했고, 산업재해보험을 신청하자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압둘라가 다니던 병원과 회사를 방문했다. 병명이 퇴행성디스크라며 압둘라 개인의 문제로 당장이라도 쫓아낼 기세, 더 이상 기대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을 방문, 합당한 절차에 의해 평가받은 업무관련평가서를 토대로 산업재해보험을 신청했고 5개월 뒤인 10월5일 결정이 나 현재는 전문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 3년 동안 아프다는 소리 한번 없이 밀고, 끌고, 드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다 3월24일 다친 허리를 재대로 치료하지 않아 5월30일 드러난 것이란 이유가 받아드려진 것이다.
말이 5개월이지 산업재해보험 신청한 후 변화 없는 시간을 절실하게 지켜보기란 참! 힘든 세월이었다. 대물림 받은 가난에 심장병 걸린 형(45세)을 수술시키겠다며, 다리가 아파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77세)와 세 딸들에게는 더 이상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8개월 치 월급을 털어 한국어를 배우고, 신체검사(3회)를 받고 무슨 일을 시킬지도 모르는 한국인사업주선택을 받아 비행기 표를 구입 두 번째 한국에 온 압둘라, 3년을 회사를 위해 군 말없이 죽어라 일을 하다 노동력을 상실한 자신의 처지를 더듬더듬, 눈물 흘린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간(08:00~20:00), 야간(20:00~08:00) 2교대로 쉬는 시간 없이 교대로 점심을 먹고,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을 휴일로 쉬어가며, 100kg 철재빠레트를 뒤집고, 1.5t ~ 4t의 자재를 실은 대차를 밀고 끄는 작업을 해 받은 월 통상임금이 97만6320원, 통장에 찍힌 200∼250만원을 벌기위해선 살인적인 잔업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돈으로 형의 심장수술을 해줬고 어머니와 딸들이 가난에서 미래를 꿈꾸게 해줬던 희망이었다.
신청한 휴업급여 5개월치 임금 70%를 찾아가라는 문자메시지를 보여주며 가족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다며 웃던 압둘라, 남은 한국에서의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아무쪼록 치료 잘하고 고향인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나만간(NAMAGAN)으로 건강하게 돌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민주노총 서부산노동상담소’를 비롯해 뒤늦게나마 격려와 힘을 보태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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