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뉴스=최형선 칼럼니스트] 수년 전 곤파스란 태풍이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 마치 38선을 관통하듯 태풍이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고 지나갔었다. 마치 남북이 다시 한번 나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무척 아팠었다.
최근 연속으로 한반도를 찢어 놓은 태풍의 위력 앞에 우리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문제를 겪으며 국민의 마음이 찢겨진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이끌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또 통일 한국을 준비할 지도자를 우리는 열망하고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이름은 이성계(李成桂)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이름이었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이름을 단(旦: 아침)으로 개명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신성하게 여겼다.
만약 임금의 이름이 사람들이 많이 쓰는 글자일 경우 어떻게 되겠는가? 임금의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룰 성이 들어가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되고 계수나무 계가 들어간 글자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두 글자가 너무 흔한 글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 일은 백성들의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것이란 생각을 한 태조는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개국시조로서 아침을 의미하는 단이란 이름을 채택한 배경이다.
우리에게 선출되는 지도자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위인이기를 희망한다.
태풍에 처음으로 호칭을 부여한 것은 호주의 일기 예보관들이다. 당시 호주 예보관들은 자신이 기피하는 정치인을 선택했다. 태풍이 1주일 이상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또 같은 지역에 하나 이상의 태풍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1953년부터는 공식 명칭이 붙게 되었다.
군사적 특수성 때문에 미국 공군과 해군에서 태풍 이름을 지명하게 되면서 예보관들은 자신의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남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8년까지 태풍 이름은 여성 이름 일색이었다. 이후에는 남성에게도 기회를 주게 되면서 여성 이름과 번갈아 사용했다.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태풍들은 1999년까지 미국 태풍합동경보센터에서 정한 영문 이름을 표기했으나 2001년 1월 1일부터는 아시아 국민들의 태풍 경계의식을 고무시키기 위해 아시아 14개국의 고유 명사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태풍 이름은 각 국가에서 10개씩 제출한 총 140개로 구성되는데 이를 순차적으로 사용한다. 이 호칭이 하나도 남김 없이 소진되면 1번부터 재활용하게 된다.
태풍 명칭을 부르게 된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름이 암시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2003년 추석에 남부지방을 강타했던 매미란 태풍은 우리의 한글 이름이었다. 그래도 그 동안 한글로 명칭된 태풍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자비로웠다. 2011년의 메아리는 대한민국에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가 공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틀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 한국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체제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정치가 진보했음을 의미한다. 시련이 닥쳐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국민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인물이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 국민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꿀 수도 있는 그런 인물이라면 우리에게 적격 아니겠는가?
2001년까지도 운행을 하던 비둘기호 열차는 역이란 역은 모두 멈춰서는 완행열차였다. 그러나 느리고 허름한 이 열차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통학생들이나 부지런한 장사치들의 애환이 서린 기차였기 때문이다. 비둘기호가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운행할수록 적자만 늘어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비둘기호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통일호를 타야 했다. 하지만 통일호마저 2004년에 없어졌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새마을호보다 훨씬 빠른 KTX가 나타났다.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지금은 KTX를 탄다. 그러나 모두가 KTX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 없는 노인들이나 장사치들과 같은 서민들은 비싼 요금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빠르고 쾌적한 KTX가 등장했어도 비둘기호를 이용할 수밖에 없던 우리의 많은 이웃들은 이동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른다. 기술과 경제 논리가 우리의 마음을 앗아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장만을 추구하던 우리에게 수많은 낙오자가 생겨났다. 누가 그들을 일으켜서 보듬어 안고 다시 힘을 내서 함께 시작하자고 말할 것인가? 단지 감상적인 상념에 젖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그런 위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극화와 경제 성장 동력에 희생을 당한 이들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건설 사업을 추진할 땅도 없다. 이제는 숨을 고르고 다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충만해져야 하고 함께 많은 것을 공유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할 필요가 있다. 북의 동포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격변기를 맞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우리의 선택이 새로운 역사를 결정지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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